서울악극단 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969년 동양방송 ‘웃음의 파노라마’로 데뷔했다. “웃으면 복이 와요”, “부부만세”, “유쾌한 청백전” 등에서 주로 서민적인 캐릭터를 맡았다. 턱이 길어서 주걱턱이라고 합니다.
그는 속사포처럼 말하는 특유의 화술로 구본서 서영춘 배삼룡 이기동 등 인기 개그맨들과 함께 70, 80년대를 풍미했다.
심철호는 방송 중에도 사회복지 분야에 관심을 갖고 헌신적인 활동을 했다. 1981년 전화상담 전문기관 사랑의 전화를 설립, 운영했다.
연예인이 사회복지사업을 벌이는 것에 대해 일회성 쇼가 아니냐 정치에 뜻을 두고 하는 일 등으로 소문이 나자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서 사회복지 석사학위를 받으며 진정성을 보였다.

1990년대 들어서는 연예활동을 접고 결식노인, 소년소녀가장, 실업자 등을 위한 봉사활동에 전념했다.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가 되자 노숙인을 위한 쉼터를 개설해 노숙인을 가정으로 돌려보내는 사업을 벌였다. 1998년부터는 대형버스 1대와 사회복지사, 간호사로 구성된 이동복지관을 운영해 동네 등을 찾아 봉사활동을 해왔다. 좋은 부모 되기 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청룡봉사상(1988), 제5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국무총리 표창(1998), 문화훈장 옥관장(1999) 등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휴가 나온 광대 중국 대륙에 사람을 태우고 심철호 중국기행 러시아 리포트 등이 있다.
심철호는 지병인 간경화로 수차례 수술과 입원을 반복한 뒤 2002년 12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3세. 고인은 경기 광주 삼성개발공원 묘역에서 영면했다. 그는 웃음 속에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실천한 코미디언으로 남았다.

평생 봉사 인생을 보낸 그는 폭력배의 습격을 받아 거의 죽을 뻔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명 심철호 집단폭행사건 심철호 습격사건이다.
1980년 5월 30일 저녁 심철호(41)는 일을 마치고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오후 8시 10분경 서울 강남구 반포동 신반포아파트 2동 앞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이어 심철호의 차를 따라오던 하늘색 승용차가 멈추자 3명의 남자가 내렸다.
이들은 조직을 짜기 위해 심 씨를 10m가량 끌면서 얼굴과 가슴을 주먹과 발로 집단 폭행했다. 심철호는 저항할 틈도 없이 일방적으로 당하자 살려 달라고 외쳤다. 심 씨의 비명소리를 듣고 아파트 경비원(38)이 달려가자 범인들은 심 씨를 쓰러뜨리고 달아났다. 이 중 김모 씨(21)가 50m가량 달아나다가 경비원에게 붙잡혀 경찰에 인계됐다.
김씨는 경찰에서 “고향 선배가 ‘하면 잘 먹고 잘 산다’며 폭행했고 그 이유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경찰은 심 씨가 연예인 새마을봉사단 단장을 맡은 점 등으로 미뤄 연예인 계파 싸움 과정에서 일어난 청부폭력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사에 나섰다. 전치 2주의 부상을 입은 심철호는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경찰 수사는 더디기만 하다. 경찰은 사건 발생 95일째인 9월 3일 주범 정아무개(43연예인 새마을봉사단 기획국장) 씨와 하수인 이아무개(40) 씨 등 3명을 검거했다.
경찰은 정씨가 하수인에게 300만원을 주기로 하고 우선 착수금 50만원을 준 뒤 다시는 연예활동을 못할 정도로 폭력을 행사해 달라고 사주했다고 밝혔다. 범행 동기는 연예인 새마을봉사단장을 지낸 심세가가 건방지게 논다는 이유였다.
경찰에 따르면 정 씨에게 조종된 이 씨는 행동대원 김 씨와 다른 김 씨 등 4명에게 이 돈을 주고 범행을 실행에 옮겼다고 한다. 그는 자금의 출처와 배후 관계는 수사해 봐야 밝혀질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언론의 보도 내용 그러나 경찰은 의혹만 남긴 채 수사를 종결하고 말았다. 이 사건의 가장 큰 의문은 범행 동기, 자금 출처, 배후 등 제대로 드러난 게 하나도 없다. 강남경찰서 수사과장은 기자회견에서 범인들이 새마을봉사단에 충성하기 위해 내 돈을 들여 사건을 일으켰다고 생각해 달라고만 말했을 뿐이다.
범행 자금 300만원에 대해 정 씨는 자신이 차고 있던 롤렉스 시계를 팔고 부인이 돈을 받은 100만원, 친구에게서 60만원을 빌려 마련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전혀 입증되지 않았다.
더욱이 정 씨는 심철호와의 원한도 없어 부자 가정이 아니었다. 그는 1978년 새마을봉사단 기획국장으로 취업해 월 45만원의 월급으로 부인, 세 아들과 함께 어렵게 살았다.
심철호는 폭행 배후로 당시 연예인 새마을봉사단 S 씨 등을 지목했지만 경찰은 이들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범인은 있지만 동기가 모호해 범행 자금이 오갔지만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배후는 흐지부지된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은 온갖 의혹을 남긴 채 마무리됐다.